[미디어 리뷰] 미야자키 하야오를 영화와 책으로 함께 만나다 – “바람이 분다”와 “책으로 가는 문”

바람이분다_책으로가는문

1.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이 분다” 와 “책으로 가는 문”

일본 애니메이션을 대표하는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6일 기자회견을 열어 은퇴를 공식 선언했다. 5일 한국에서 개봉한 “바람이 분다”는 미야자키의 은퇴작이 되었다. 은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체력적 한계’였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사회운동이나 정치적 발언과 행보에 대해선 선을 그으며 “난 문화인이 아니다. 문화인이 되고 싶지도 않다. 난 마치코바(町工場·동네에 있는 작은 공장)의 아저씨다. 그냥 집과 직장을 내가 직접 운전하면서 왕복할 수 있는 동안에는 ‘일’을 계속할 것이다. 난 50년 동안 이 세상 어린이들에게 ‘이 세상은 살아갈가치가 있단다’라는 걸 전하고 싶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10년간은 그럴 생각이다.”(중앙선데이, 9월 8일 자)라고 답했다.

8월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책 “책으로 가는 문”이 현암사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이와나미 소년문고를 말하다’라는 부제가 알려주듯 이 책은 미야자키가 어린이 문학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2010년 “마루 밑 아리에티”(원작 “마루 밑 바로우어즈”, 이와나미 소년문고) 개봉과 이와나미 소년문고 창간 60주년을 맞아, 미야자키가 오랫동안 즐겨 읽은 400여 권 가운데 50권을 골라 추천했다. 지브리 스튜디오는 이를 “이와나미 소년문고 50권”이라는 비매품 소책자로 묶었다. “책으로 가는 문”은 이 소책자 내용을 1부, 몇 차례의 인터뷰와 대담을 정리한 것을 2부로 구성해 만든 책이다. 찬찬히 읽어 나가면 미야자키의 작품 철학과 최근의 시대인식까지 짚어볼 수 있다.

2. 평생을 어린이 문학과 함께 살다

미야자키는 어린 시절뿐 아니라, 대학 때 어린이문학연구회에 들어가 어린이책을 읽었고,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 입사한 뒤에는 기획을 위해서 닥치는 대로 어린이책을 독파해나갔다고 한다. 그렇게 아이들의 심리와 본성을 이해하고, 이야기 구조를 익히고, 상상력을 키우고, 멋지고 아름다운 그림을 배우고 익혔다는 얘기다. 미야자키는 어린이 문학의 의미에 대해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린이 문학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다” 하고 인간 존재에 대해 엄격하고 비판적인 문학과는 달리 “태어나길 정말 잘했다”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어 다행이다. 살아도 된다”라는 응원을 아이들에게 보내려는 마음이 어린이 문학이 생겨난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 “책으로 가는 문”, p.155

미와자키가 추천한 책 가운데 몇 가지를 소개한다.

치폴리노의 모험 – 물론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특히 일러스트가 능숙하고 유쾌해서 무척 즐겁게 읽을 수 있습니다. 저는 토마토 기사나 꼬마 레몬병 그림을 아주 좋아해서, 그리기 솜씨를 익히는 데 꽤 영향을 받았습니다.

장미와 반지 – 옛날이야기인데, 힘도 지혜도 없는 소년이 현명하고 힘차게 변해가는 이야기입니다. 어린 시절에 이 책에서 얼마나 큰 격려와 위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형제에게도 친구에게도 비밀로 간직하고픈 소중한 책이었습니다.

삼총사 – 통쾌한 모험 활극이라는 이름에 이만큼 걸맞는 책도 없을 것입니다. 두근두근하게 만든다는 건 이런 책을 두고 하는 말이죠. 뭔가 도움이 되느냐고요? 물론입니다. 책 읽기가 이토록 즐거운 일이라는 걸 가르쳐주니까요.

우리 이웃 이야기 – 애니메이션을 만들던 어느 날이었는데, 녹초가 되어 집에 와 이불 속에서 이 책을 읽었습니다. 짧은 작품 안에 세계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문학이란 굉장하구나, 이런 게 문학이구나’ 하는 생각이 솟아났습니다. 우리가 여럿이 매일매일 밤늦게까지 책상에 매달려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려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일을 해낸 이 책이 애니메이션보다 근사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조금은 서글퍼졌습니다.

3. 더 이상 판타지를 만들 수 없는 이유

책 끄트머리에 동일본대지진 이후에 한 인터뷰가 예사롭지가 않다. 이 인터뷰를 할 때가 한창 새 애니메이션 “바람이 분다”를 제작하던 시기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20년 동안, 일본에서는 경제 이야기만 해왔습니다. 마치 터질 만큼 물이 가득 찬 풍선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언제 터질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영상과 게임과 소비에 빠져들면서, 개를 키우고 건강과 연금 걱정을 하고 조바심을 내면서, 결국 경제 이야기만 해왔습니다. 불안만큼은 착착 부풀어 올라 스무 살 젊은이와 예순 살 늙은이가 다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뭔가 일어날 거라고, 다들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무리 훌륭한 전쟁보다 어리석은 평화가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돌연 역사의 수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살아가기 어려운 시대의 막이 오른 것입니다. 일본만이 아닙니다. 파국은 세계적 규모가 되었습니다. 대량 소비 문명이 확실한 종말의 제1단계에 들어선 것으로 보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제정신을 잃지 않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 같은 책, pp.150~151

그래서 지금 ‘바람이 불기 시작한 시대’에는 판타지, 행복한 애니메이션은 어쩐지 거짓말 같은 냄새가 나기 때문에 만들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4. 판타지를 버리고 선택한 ‘현실’의 결과는?

“바람이 분다”는 생각보다 길고 지루하다. 화면이 아름답고 음악 또한 조화로우나 주인공의 열정과 애절한 사랑만으론 이야기를 힘있게 끌고 가지 못한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주력기였던 제로센 전투기를 만든 호리코시 지로라는 실존 인물을 내세웠으나, 인물에 미야자키 자신의 비행기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짙게 밴 나머지 실존 인물로서의 존재감이 약하다.

‘아름다운 비행기를 만들고 싶다’는 주인공의 순수한 열정을 드러내기 위해서 미야자키는 어쩔 수 없이 ‘판타지’를 수용한다. 주인공의 롤모델인 이탈리아 비행기 설계자 카프로니 백작과의 만남과 대화는 주인공이 카프로니 백작의 꿈에 들어가는 형식이다. 이 판타지 안에서 피해 갈 수 없는 구체적인 역사와 복잡한 현실을 뭉뚱그려 은유적으로 처리한다. 동화적인 방식이다.

일본의 군국주의가 극한으로 치닫고 마침내 파멸에 이르는 과정에서 자신의 꿈을 온전히 실현할 수 없었던, 그러나 어쨌든 살아가야 하는 한 개인의 삶을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미야자키는 지금 자신이 사는 시대가 그때와 같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결국 ‘바람이 불기 시작한 시대에 우리는 제정신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셈이다. 이 해석이 “바람이 분다”에 대한 가장 우호적인 평가일 것이다.

미야자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택한 역사적 현실은 평생을 어린이 문학과 판타지를 기반으로 작업한 이에겐 버거운 소재였다.
존경하는 대가의 마지막 작품으론 아쉽다.

서채홍

참고: 미야자키 하야오, “책으로 가는 문”, 송태욱 옮김, 현암사, 2013.

[서채홍의 디자인 커뮤니케이션] 행복을 바람 – 빵으로 구운 글자 이야기

행복을바람

1.
얼마 전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뜨겁게 달군 “진정한 행복에 대하여 – 가족 중심 문화의 중요성(http://wp.me/pD8xo-DZ)”이라는 글을 많은 이가 읽고 공감했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뺏긴 대부분의 한국 직장인들의 삶을 저마다 한 번씩 돌아보게 했다. 마을 버스를 타지 않고 전철역에서 집까지 걸어 올라가며 그 글을 읽었다.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여러 종류의 일들이 산더미처럼 느껴져 어깨가 무겁던 차에 우울했다.

2.
행복이라······. 그 며칠 뒤,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모니터에 사진 한 장을 꺼냈다.
“행복을 바람” 기분이 좀 나아졌다. 작년 초 어느 주말, 오븐에 빵을 구워 먹으려고 아이들과 빵가루를 반죽하다가 만든 글자다. 당시 디자인 작업을 진행하던 책 제목 가운데 일부분이다. 집에서 아이들과 지내는 동안에도 머릿속에 일이 들어 있었던 게다. 그게 꼭 나쁘지는 않았다. 그 뒤로 다양한 재료로 아이들과 글자 만들기 놀이를 자주 했고, 아이들도 좋아했다. 당연히 한글을 익히는데도 도움이 됐다. 타이포그래피를 다루는 디자이너가 아이들과 직업정신을 살려 노는 방식 가운데 하나이다.

3.
빵은 뱃속으로 들어가 사라졌어도 사진이 이렇게 남아 내게 위로를 주니 그 추억이 정말 고맙다. 믿고 따르는 선생님이 ‘닥쳐올 미래의 시간을 걱정하지 말고, 지금 아이들과 지낼 수 있는 시간 만큼은 행복하게 누려라’고 말해준 것이 기억난다.

진심으로 여러분 모두의 행복을 바랍니다.

서채홍

[첫문장, 끝문장] 의도적 눈감기 | Wilful Blindness, 마거릿 헤퍼넌 (2011년작)

의도적눈감기

* 주: 오늘 경향신문에 정신과 의사 하지현 교수가 소개한 책입니다. 제가 디자인한 책이라서 더 반가웠습니다. 작업할 때 원고를 매우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책이 출간된 뒤 언론의 반응이 뜨거웠지만 독자들의 반응은 미미한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워낙 좋은 내용이라 언젠가는 스테디 반열에 오를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내부 고발자’에 대한 얘기도 있어 최근 ‘스노든’ 사건에 대해서도 곱씹을 만합니다.

– 첫문장: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는 다섯 살 때, 폐렴과 천식으로 뉴욕의 윌러드 파커 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었다. …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매일 아침마다 눈을 뜨면 우리는 묻곤 했다. ‘찰리는 어디로 갔나요?’ 그러면 간호사는 이렇게 답하곤 했다. ‘집으로 갔단다.’ ‘아, 정말 잘됐어요. 퇴원해서 집으로 갔다니!’ 하지만 그곳에서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 끝문장: 알지 않겠다고 결정을 내릴 때 우리는 스스로를 무력하게 만든다. 그러나 보겠다고 주장할 때는 우리 스스로에게 희망이 생긴다. 의도적 눈감기가 의지에 의해 결정된 일이며 경험과 지식, 생각, 뉴런, 신경증 등이 한데 섞인 산물이라는 사실은 의도적 눈감기를 바꿀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리어왕처럼, 우리는 더 잘 보는 기술을 배울 수 있다. 뇌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바꿔야 한다. 모든 지혜가 그렇듯, 보는 것은 단순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내가 알 수 있고, 알아야 함에도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지금 여기서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인가?

서채홍

출처: 푸른숲, 김학영 역, 2013년 초판 1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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