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민영의 위기전략 37] 재난의 골든 타임,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이 현장지휘관이 된다

 

1. 2014년 5월 70대 남성이 매봉역에서 도곡역으로 가는 전동차 안에 준비한 시너를 바닥에 뿌리고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상황이 발생했다. 현장에는 다행히 서울메트로 역무원 권순중씨가 타고 있었다. 그는 신속하게 화재를 진화하는 동시에 주변 시민에게 기관실과 119에 신고해달라는 구체적 행동을 요청했다. 엄청난 인명 피해를 부를 수 있었던 폐쇄된 지하철 공간의 심각한 화재는 큰 사고 없이 진압되었다.

2. 2015년 1월 11일 주말 오전에 화재가 발생한 의정부 소재 아파트에는 진옥진 소방관 이 살고 있었다. 8층에 사는 그는 화재가 발생하자 우왕좌왕하고 있는 주민들에게 자신의 위치에서 행동 요령을 제시하고 안전한 대피를 유도했다.

1) 최초 상황을 판단했다. 아래층에서 위로 불이 번지고 있다는 판단을 했다.
2) 동요하는 주민을 진정시켰다. 상황을 파악해 외치며 주민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3) 바로 구체적 행동을 제시했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말고 옥상으로 올라가도록 유도했다.
4) 순간 탄력성을 발휘했다. 현장의 위기관리자는 끊임없는 판단을 요구받는다. 그는 옥상으로 가는 출구를 뚫었고 10층 옥상에 연기가 퍼지자 옆층 옥상으로 이동하는 판단을 했고 장치를 마련했다.
5) 스스로 구조의 역할을 수행했다. 10층 옥상에 연기가 퍼지자 옆 동으로 판자를 대어 주민들을 이동시켰다.

3. 두 가지 사례는 말해준다. 현장에 도착한 첫 번째 지휘자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 종이 매뉴얼이 아니라 몸으로 배운 매뉴얼이 현장의 매뉴얼이 된다는 것. 결국 훈련된 사람이다. 재난 상황에 대처할 실제형 훈련(시뮬레이션 리허설)이 중요한 이유다. 누구나 현장지휘부가 될 수 있다는 생각, 그것이 핵심이다.
진 소방관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결정의 잘못될까봐 걱정이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그가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백에 빠진 화재 현장에서 시간을 놓친 많은 피해자들이 발생했다.

4. 매뉴얼과 안전 관리자에 국한된 훈련은 한계가 크다. 민방위 훈련과 같은 형식적 훈련은 실효성이 적다.
좋은 준비 사례가 하나 있다. 서울시 소방방재본부가 주도해 서울 전역을 포괄하는 10만 위기관리자를 양성하고 실제형 교육과 훈련을 받게 만들려는 계획은 그런 점에서 재난을 대비하는 최선의 정책이며 방책이다.

유민영

[말과글] 매뉴얼이나 재난 대응 컨트롤타워보다 더 중요한 것은

* 5월 7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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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리뷰] 현실적인, 너무나 현실적인 위기의 진화. 그래서 무서운 영국 드라마 ‘블랙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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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아마 오늘 일어나자마자 블랙미러를 보았을 것이다. 버스를 타서도, 일을 할 때도 블랙미러를 보았을 것이다. 이미 짐작하셨을 분도 있을 테지만, 블랙미러는 스크린이다. 스마트폰, 텔레비전, 노트북 등등 소통과 통신의 기구는 모두 블랙미러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영국드라마 <블랙미러>다. 현재 존재하는, 혹은 가까운 미래에 있을 법한 ‘블랙미러’의 세상을 그린다. 그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비극을 표현한다. 너무나 있을 법해서 끔찍한 스토리다.

그 중 첫 번째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블랙미러로 새로 생산된 위기상황에 대해 분석했다. 에피소드 1, The National Anthem (국가, 國歌)이다.

(스포일러-투성이. 주의요망)

1. 상황 발생: 협박, 그리고 요구

영국의 어느 새벽, 수상은 수잔나 공주의 납치소식을 보고받는다. 그리고 수잔나 공주가 납치범의 성명서를 읽는 영상을 보게 된다.

“저는 수잔나입니다. 보몬트 공작부인입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졌기는 수잔나 공주입니다.
제가 있는 곳은 당신들이 찾을 수 없는 곳이고 추적할 수도 없는 사람에게 붙들려 있습니다.

마이클 캘로우 수상님, 제 목숨은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들이 지시하는 대로 정확히… 오늘 4시까지 하지 않으면 저는 죽을 거예요.”

여기서 수상의 보좌관들은 영상을 잠시 멈춘다. 영상 속의 여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수잔나 공주이며 영상의 다음 부분에서 수잔나 공주가 수상에 요구할 내용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미리 인지시킨다.

수상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최악의 요구를 예측한다.

“원하는 게 뭔데? 돈? 지하디를 풀어주는 것? 제3세계의 빚을 없애는 것? 빌어먹을 도서관들을 살리는 것?”

예측가능하다시피, 전부 다 틀렸다.
영상은 다시 재생된다.

“요구는 하나뿐입니다. 그리고 간단한 것입니다. 오늘 오후 4시에 수상 마이클 캘로우는 생방송으로 영국 텔레비전과 모든 방송국, 지상 및 위성 방송에 나와서 어떠한 연출도 없이 돼지와 성관계를 하십시오.”

그리고 영상이 끝나기 전 수잔나 공주는 단말마적으로 외친다.
“이해가 안 돼요!”

2. 위기관리 매뉴얼 실행: 실패

이해가 안 되기는 수상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문제는 이미 발생했고, 남은 것은 어떻게 문제를 풀 것이냐이다.

2-1 추정 – 실패

범인 추정은 대개 범인의 요구에서 추정할 수 있다.
‘특정 테러리스트를 석방하는 것’을 요구했다면 그 테러리스트 연관 집단이 범행을 저질렀을 것이라 유추할 수 있다. 제3세계 빚을 탕감하라고 요구했다면 그 세계와 관련이 있는 범인의 소행일 것이다. 영국의 공주를 납치하는 위험과 맞먹을 돈을 요구했다면 지하 범죄조직일 가능성이 커진다.

수상의 예측 모두가 빗나갔다.
극에서 범인의 요구는 수상이 돼지와 성교하는 것이다. 이제 고민해야 할 것은 누가 수상에 원한을 가졌느냐이다. 이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적어도 반나절 만에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는 그 고민을 하는 데에 15년을 소비했다.)

2-2 협상 – 실패

협상 경로가 없다. 메일 주소도, 암호도 없다.

2-3 봉쇄 – 실패

그렇다면 이제 수상이 해야 할 일은 이 사건이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막는 것이다.
“전담팀을 만들어. 일이 퍼져나가면 안 돼. 이 방 사람들만 알고 있는 거야. 해커들이 설치고 다니는 거라면 봉쇄해. 긴급 D통고(언론의 보도를 막는 정부의 통고)를 내려.”

보좌관의 대답으로 모든 희망은 무너진다.

“이 영상은 유튜브에서 나온 겁니다.”
“올라온 지 9분 뒤에 내렸지만 그 사이에 이미 다운로드되고 복사되어 퍼졌습니다. 저희가 하나를 지우면 여섯 개의 복사본이 다른 데서 불쑥 나타납니다.”

블랙미러1-1

2-4 “오 젠장, 빌어먹을 인터넷! 이제 어떻게 할 건데? 따라야 할 지침은?”

답답해진 수상의 물음에 보좌관의 대답이 절망적이다.

“이건 사상 초유의 일입니다, 수상님.
지침 같은 건 없습니다.(There’s no play book)”

3. 비극의 요건

3-1 전문화된 대중

결국 수상 측은 범인을 찾을 수 없었다. 대신 보좌관은 특수효과를 써서 돼지와 성교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려는 시도를 한다. 역시 실패했다.

“영상 마지막에 지시 목록이 있어. 구체적인 카메라 각도 같은 것들. 도그마 95처럼 말이야. 도그마95는 영화운동이야. 라스 폰 트리에가 주도했어. 감독들의 선언이지. 배경 음악도 없고 자연광만 사용해서 진정성을 나타내는 거야. (범인의) 지시들이랑 똑같아. 그래서 속임수를 못 써. 그냥 그대로 하는 수밖에 없어.”

<블랙미러> 중 시민 한 사람의 말이다.
전문가는 소수이지만, 그 전문성은 통신기술의 발달로 대중에 퍼진다. 전문화된 대중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속임수는 없다.

3-2 대중은 볼 것이다.

방송국 UKN는 대중들의 반응을 분석했다.

ㄱ. 차마 보질 못 하겠더군요. 저는 안 볼 거예요. 생각 만으로도 끔찍해요.
ㄴ. 역겨워요. 정말 역겨워요. 한 번 생각해보세요.
ㄷ. 혐오스럽긴 하겠지만 한다면 영웅이 될 거예요.
ㄹ. 사람들은 수상이 미친 사람인 양 쳐다볼 거예요.
ㅁ. 텔레비전에서 보게 된다면 정말로 웃길 거예요.
ㅂ. 수상한테는 별로 비정상적인 일도 아니죠. 의원들이랑 수상들은 전부 다 변태니까요.

결국 수상은 돼지와 성교를 했고 생중계됐다.
대중은 관음증을 이기지 못했다. 방송시간 모든 사람들은 텔레비전 앞에 앉았고 거리는 텅텅 비었다. 적어도 극중에서 그 방송을 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블랙미러페

4. The National Anthem

범인은 ‘예술가’였다. 예술가의 성명서가 불러온 현상, 텅 빈 거리, 표정을 일그러뜨리면서도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는 사람들의 단상을 ‘빚은’ 것이었다.

감독은 이 에피소드의 부제가 The National Anthem(국가)인 이유를 후반부에 분명하게 설명한다.

“1주년을 맞이한 지금 한 문화 비평가가 이 사건을 21세기 제1의 위대한 예술이라 표현해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문화비평가들이 이 사건의 의의를 토론하고 있지만 13억 전 세계 시청자들이 함께한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참여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이 에피소드는 새로운 위기의 형태인 동시에 한 편의 블랙코미디였다. 그러나 아무도 웃을 수는 없다. 모두가 공범이기 때문이다.
내게, 혹은 당신에게 이런 위기가 닥친다면 빠져나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