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페인 100장면]나폴레옹의 국민투표 캠페인

Napoléon Bonaparte, 1769~ 1821, 프랑스 황제(1804~1814,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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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가 로마 역사상 최고의 캠페인 천재라면 나폴레옹은 프랑스 역사상 최고의 캠페인 천재라 할 만하다. 카이사르가 전쟁을 통해 얻은 명성으로 시민의 지지를 얻고, 쿠테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것처럼, 나폴레옹도 같은 방식으로 권력을 얻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카이사르는 끝내 황제가 되지 못했지만, 나폴레옹은 스스로 황제의 지위에 오르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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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이 유럽 정복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무렵의 프랑스는 계속 되는 혼란 속에 놓여있었다. 시민혁명으로 기존의 귀족들이 밀려나면서 권력을 향한 다수의 투쟁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이 때 나타난 것이 50만 이상이 체포되고 수만 명이 처형 당한 공포정치였다. 이 기간 동안에는 굶주림 과 두려움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고 혁명 이전과 비교해 시민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에서 크나큰 패배를 당하였지만 여전히 국민들의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는 곧 대중의 인기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허약한 혁명 정부를 무너뜨린다. 이 후 거침없는 개혁정책과 하늘을 찌르는 인기에 힘입어 종신통령에 출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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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그의 천재성이 잘 드러난 것은 국민투표의 창조적 활용이다. 이전까지 국민투표는 추상적 개념이었다. 국민투표는 로마시대에 ‘국민과 상의’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프랑스 혁명 때 자코뱅당이 헌법 통과를 위해 사용했었다. 나폴레옹은 여기에 살아있는 피와 살을 붙이고 영혼을 불어넣었다. 전국민의 의사를 물어 최고 통치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국민들은 환호했다. 이보다 드라마틱하고 가슴 벅찬 권력으로의 이동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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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2년 국민투표 당시 국민들이 표시해야 할 의사는 간단했다. “나폴레옹이 종신통령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네” 혹은 “아니오”로만 표시하면 됐다. 다른 후보나 선거 공약은 없었다. 공개 투표였고 누가 찬성했고, 반대했는지 알 수 있었다. 결과는 찬성 360만표, 반대 8272표였다.

황제가 된 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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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강력한 내정 개혁 실시로 그의 인기가 나날이 높아지자 측근 인사들은 그에게 황제가 될 것을 권유하였고, 이에 나폴레옹은 이 또한 국민 투표로 결정하도록 하였다. 1804년 7월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기 위한 국민투표가 열렸고, 찬성표 3,572,329와 반대표 2,569로 압도적인 국민들이 제정을 수락하였다. 수많이 민중들이 피를 흘리며 저항하여 왕정을 없앤지 10년 만에 그들의 손으로 왕정을 부활시키도록 만든 것이다.

대관식에서 아내 조세핀으로 황후의 관을 씌여주는 모습. 후에 나폴레옹은 ‘격’에 맞는 황후가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조세핀과 이혼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마리 루이즈와 재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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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프랑스는 현재의 제도상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정치적 문제가 발생할 때 국민투표 제도를 적극 활용하였는데, 조카이자 2대 황제가 된 루이 나폴레옹도 국민투표로 황제가 되었고, 드골도 의회 개혁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부결되자 대통령에서 하야한 바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세종시 수도 이전에 대한 국민 투표를 제안한 것도 이러한 전통에서 비롯된다.

김성은

[캠페인 100장면]메디치가의 사회공헌 캠페인 Medici, 13C ~ 17C, 피렌체 최고 권력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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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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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의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기업의 사회적 책임) 캠페인을 보면, 간혹 독특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도 눈에 띄지만, 대부분의 경우 보여주기 식의 형식적인 행사에 그치는 것을 많이 목격한다. 정형화된 기념사진과 상투적인 문구로 설명되는 캠페인에는 어떠한 감동이나 통찰도 들어있지 않다. 여기 사회 공헌 캠페인의 원조라 할 만한 한 가문이 있다. 이들은 집안 대대로의 사회공헌 활동을 통해 가문의 위상을 드높였을 뿐만 아니라 통치의 수단으로까지 승화시키는데 성공했다. 바로 메디치 가문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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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의 시작이자 국부로 칭송받는 코지모 데 메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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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가는 근대 초기 유럽에게 가장 돈이 많은 집안 중 하나였다. 요즘으로 치자면 전세계 재계 서열 순위 10위권 안에 드는 기업이었다. 피렌체를 기반으로 이탈리아 반도와 유럽을 넘나들며 주로 은행업과 제조업의 사업을 벌여 큰 부를 쌓았다. 현대적 복식부기 방식을 처음 도입하여 사업에 활용한 곳도 메디치이다. 한 기업이 이렇게 돈이 많아지면 사회적 영향력이 커지게 되고 이는 곧 권력으로 연결되는 법이다. 피렌체의 라이벌 가문과의 파워 게임을 거쳐 메디치도 독점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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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가의 통치 방식은 독특했다. ‘보이지 않게 통치하는 것’이 제 1의 룰이었다. 그들은 어떠한공직에도 오르지 않았다. 권위자가 되지 않고 피렌체의 첫번째 시민이 되겠다는 것이 내세운 이유였다. 대신 가문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수많은 대리인들이 있었다. 피렌체의 행정 및 사회적 문제들은 대리인을 통해 메디치가의 뜻대로 이루어 진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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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일가의 사람들은 종종 그림 속에 등장하고 한다. Benozzo Gozzoli가 그린 동방박사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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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의 제 2의 룰은 ‘권력의 정당성은 국가에 대한 기여로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메디치가가 없는 피렌체의 발전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코지모 데 메디치는 인문학을 가르치기 위한 학교를 짓고 학자들을 불러모았다. 건축가들에게 성당을 비롯한 건물과 다리, 도로 등을 건설하게 했다. 막대한 금액이 드는 일이었고 오직 메디치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시민들은 코지모를 칭송하여 피렌체의 기본 인프라를 구축했다는 의미에서 ‘국가의 아버지’ 라고 불렀다. 이러한 전통은 후대의 ‘위대한 로렌초’를 비롯해 수많은 메디치 후손들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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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박해를 피해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은 갈릴레오 갈릴레이. 후에 보은의 뜻으로 자신이 발견한 별을 메디치에 헌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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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문화와 예술의 후원자로서의 메디치 가문의 안목은 탁월했다. 그들로 인해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꽃피울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문 구성원들은 소박한 옷차림에 검소한 생활을 추구했지만, 안목은 최고급이었다. 부를 과시하기 위해 예술을 소비한 것이 아니라, 예술을 소비하기 위해 부를 축적했다. 메디치 가문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핵심적 후원자였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도나텔로,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부르넬레스키, 풀라 안젤리코와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이 메디치 가문의 후원아래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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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메디치가 인권과 자유의 가치를 존중하며 통치를 한 것은 아니었다. 정쟁과 모략의 시기였고, 필요하다면 납치, 고문, 살인은 얼마든지 용인될 수 있었다. 메디치 치하의 시민들은 다른 도시국가의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억압되고 검열된 사회에 살았다. 하지만 메디치에게는 우아한 포장지가 있었다. 사회적 헌신과 예술에 대한 사랑이라는 프레임은 메디치 가문의 권력에 대해 시민들의 자발적인 순응을 이끌어 내는 매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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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의 국가 봉사와 재산의 기부 등은 고대 로마적 전통으로 계승되어 내려오는 것이었지만, 메디치 만큼 확고한 목표 아래 지속적이고 일관되고 사회공헌을 유지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가문의 마지막 후손인 안나 마리아 루이사 데 메디치는 가문 소유인 우피치(Uffizi, office) 건물과 소유한 모든 예술 작품을 국가에 기증했다. 이후 메디치가의 유산은 피렌체 뿐 아니라 전세계의 유산으로 남아 있다.

김성은

[캠페인 100장면] 교황 우르바노 2세의 십자군 캠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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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e Urbano II, 1042~ 1099. 159대 교황(재임 1088~1099)

1.
두터운 붉은 망토를 두른 노인이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풍성한 옷감과 망토만큼이나 붉고 거대한 모자가 그의 머리 위에서 잠시 흔들렸다. 그가 연단에 서자 그 앞에 도열한 수많은 추기경들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이 늙고 앙상한 노인이 입을 열자, 대포와 같은 우렁찬 기운이 회의장 안을 감쌌다. 점점 격정에 빠지며 거의 울부짖는 듯한 노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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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안티오크 및 그 밖의 도시들에서 기독교도가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불경한 투르크족은 그칠 줄을 모르고 콘스탄티노플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성지의 형제들을 구해야 합니다. 유럽의 그리스도인이여! 지위가 높건 낮건, 재산이 많건 적건, 크리스트교도의 구원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신은 그대들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신의 정의를 위하여 싸우다 쓰러지는 자는 죄의 사함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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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5년 클레몽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이슬람에 대한 대대적인 성전을 외쳤던 이 노인은 교황 우르바노 2세이다. 우르바노 2세는 프랑스 귀족가문 출신으로 그레고리 7세 교황의 교회 개혁 운동을 열심히 도왔던 지지 세력이었고 빅토르 3세의 뒤를 이어 교황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대부분 역사상 가장 거대한 종교 전쟁이었던 십자군 운동을 처음 기획하고 실행한 인물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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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몽 공의회에서 설교하는 우르바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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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6년에 처음 시작되어 1270년대에 끝날 때까지 180년이 넘게 지속된 십자군 원정은 캠페인의 관점에서 그 규모와 지속성에 있어 유례 없는 대사건이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중세 시대의 특수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종교적 가치가 우선시 되었던 중세에는 귀족과 성직자를 제외하고는 교육수준이 낮고 문맹율이 높았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 특히 신화나 마법사, 기사와 미녀와 같은 로맨틱하고 환상적인 이야기가 유행이었다. 종교가 갖는 특유의 속성인 추상성, 관념성, 도덕성, 희생 추구가 강조되다 보니 중세인들의 사고체계도 관념적이고 감정적인 자극에 더 취약했다. 그래서 감성적으로 쉽게 선동되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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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자 피에르를 따라 군중 십자군을 떠나려는 사람들

5.
이교도들을 몰아내고 비잔틴 제국을 건설하고자 열망했던 우르바노 2세는 파문이나, 구원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교황이었다. 교황은 면죄부와 구원을 조건으로 내걸고 십자군 기사단을 촉구했다. 그리고 십자군 전쟁은 ‘신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신성한 전쟁’이라고 선포하고, 전쟁에서 죽는 것 조차 죄를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라고 설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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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종교적 열정만으로 사람들을 설득한 것은 아니다. 십자군 원정에 환상을 품을 만한유효한 타깃이 있었다. 현재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새로운 기회를 찾는 사람들이었다. 세력 확장을 꾀하는 유럽의 제후들이 있었고, 장자상속 제도하에 상속권이 없는 귀족의 자제도 새로운 기회가 필요했다. 게다가 현재 상황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하급 기사 등은 쉽게 인생에 모험을 걸어볼 만한 대상이었다. 우르바노 2세는 그들에게 외쳤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땅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있기 때문에 빈궁해졌습니다. 이 땅에서 불행한 자와 가난한 자는 그 땅에서 번영할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내세워 그곳에 가면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난 풍요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메시지는 구약 성서부터 고전적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킨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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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내뿜은 열정은 온 유럽으로 퍼졌고 각지의 제후들과 기사들이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급기야 종교적 신념에 사로잡힌 일군의 하급기사와 일반 민중들의 무리떼가 정식 십자군이 출발하기 전에 자발적으로 먼저 출발하여 마구잡이로 공격을 일삼는 군중 십자군 사태까지 벌어졌다. 사회적 약자들과 심리적 결핍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헌신을 요구하고, 그 대가로 ‘영생’, ‘은총’, ‘지상낙원’과 같은 환상에 가득 차 보상을 약속하는 패턴은 1978년 존스 타운의 909명의 신도 집단 자살 사건을 비롯해 1987년의 한국의 오대양 사건, 1995년 일본의 옴진리교 독가스 살포 사건 등도 사이비 종교집단 뿐 아니라 히틀러의 나치당, 북한 김일성 정권 등 주로 독재정권의 사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김성은

[캠페인 100장면] 아우구스투스의 카이사르 신격화 캠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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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us, BC63. ~ AD14. 고대 로마 초대 황제(BC27~AD14 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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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는 갑자스레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권력을 원로원으로 되돌려놓으려 했던 공화파들은 카이사르 암살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권력을 되찾는 데에는 실패했다. 어렵사리 내전을 끝낸 카이사르가 사라지고 나자 또다시 피의 숙청이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가장 유력한 차기 권력자는 로마의 전설적인 명장 안토니우스였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로마의 황제가 된 것은 그 당시 알려지지 않았던 19살의 병약한 청년 옥타비아누스, 훗날 명칭 임페라토르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이다.

2. 옥타비아누스는 원래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라는 이름의 평민계급 출신 소년이었다. 혈육이 없던 카이사르에 어린 시절 입양되었고 유언장에서 카이사르의 유일한 후계자로 지목된 것이 그의 전부였다. 양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과 귀족 지위는 모두 큰 도움이 되었지만, 카이사르의 유산 중 가장 값진 것은 바로 ‘카이사르’라는 이름 그 자체였다. 카이사르의 진정한 후계자임을 보증하는 이 이름은 평생에 걸쳐 옥타비아누스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자산으로 기능한다. 자신의 이름으로 충분히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 때까지 ‘카이사르’는 라이벌들로부터 그를 지켜주는 갑옷이었고, 대중의 존경을 이끌어 내는 왕관과 같았다. 옥타비아누스가 장례 때 카이사르 재산의 일부를 로마 시민들에게 나눠준 것도 카이사르의 명성을 드높이며, 동시에 후계자인 자신을 홍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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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도 동전에 자신의 얼굴과 함께 뒷면엔 ‘Divus Julius(율리우스 신)’이라고 새겨 넣었다.

3. 무엇보다 카이사르 브랜딩의 정점은 카이사르 신격화 작업이었다. 카이사르도 생전에 율리우스 가문이 비너스의 후손임을 강조하며 신성한 혈통을 자랑했었다. 자신과 비너스와의 연계를 과시하기 위해 비너스를 자신의 수호신으로 삼아 비너스 신전을 지어 바치기도 했다. 카이사르 사후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 신격화 작업에 착수한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지 2년 후 옥타비아누스의 주장에 따라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신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하고, 이로써 ‘Divus Julius(Divine Julius, 율리우스 신)’가 탄생한다. 옥타비아누스의 이런 노력은 양아버지에 대한 추모와 존경, 그리고 법적, 사회적 의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해 자신도 ‘Divi filius(son of the divinity, 신의 아들)’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부터 옥타비아누스는 스스로를 ‘신의 아들’이라고 칭했고 이 문구는 자신의 얼굴과 함께 동전에도 새겨 널리 알렸다. 그리고 기원전 29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물리친 후 돌아와 카이사르의 신전을 건립하고 며칠간의 축제를 벌인다. 안토니우스와의 오랜 전쟁을 끝내고 돌아와 수행한 카이사르 신전 건립과 축제는 아우구스투스가 로마 권력의 정점으로 우뚝 솟아있는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는 최종 의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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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율리우스 신전의 모습(현재는 터전만 남아 있음)

4. 한편, 카이사르라는 이름 때문에 비참한 운명을 맞이해야 하는 이도 있었는데, 바로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사이에서 태어난 카이사리온이다.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살아있는 카이사르의 혈족이었으나, 또 다른 카이사르의 출현을 두려워한 아우구스투스는 살해를 명령하여 추후의 위험을 방지한다. 자신의 출세가 아버지의 이름 덕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같은 이름을 둔 형제를 살려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5. 아버지가 누렸던 명성을 상속받아 통치의 정당성으로 활용하는 후광효과는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선출하는 민주제 하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근대의 루이 나폴레옹 뿐 아니라 현대의 조지 부시, 박근혜 대통령도 그러한 예이다.
김성은

[캠페인 100장면] 카이사르의 Imperator 캠페인

<캠페인 100장면>을 시작하며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대중/집단을 상대로 벌이는 설득과 선전, 동원 등의 전략 및 활동 일체를 가리키는 ‘캠페인(campaign)’은 오랜 역사를 통해 무수히 많은 캠페이너들에 의해 전개되어 왔습니다.

피크15는 캠페인의 황제 카이사르부터 미국을 뜨겁게 달구는 힐러리의 캠페인에 이르기까지 탁월한 캠페인 사례를 찾아 소개하는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이를 통해 인류 역사에서 창조적 리더십과 대중의 관계를 되짚어 보는 기회가 되길 기대합니다.


Gaius Julius Caesar

Gaius Julius Caesar, BC 100. ~ BC 44. 고대 로마 정치가

1.

앞선 병사들은 흥에 취한 듯 외쳤다.

“시민들이여, 마누라를 숨기시오. 대머리 난봉꾼이 지나간다오.  그대 마누라들이 카이사르에게 바친 돈은 전부 갈리아 창부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오.”

 병사들의 조롱소리가 울려퍼지자 4마리 말이 이끄는 마차를 탄 붉은 망토의 사나이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군중에게 손을 흔들었다. 뒤이은 수레에는 전쟁터에서 획득한 진귀한 보석들이 실려 있었고 그 뒤를 전쟁 노예들이 따르고 있었다. 이날 로마 시민의 최대 관심사는 전쟁 포로로 잡은 갈리아의 장수 베르킨게토릭스였다. 카이사르는 개선식에 베르킨게토릭스를 전시하기 위해 3년이나 그를 살려두었다. 거리의 시민들은 환호했고 카이사르는 만족스러웠다. 갈리아 정복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로마의 내전을 진압한 후 이제 마침내 카이사르는 벼르던 개선 행진을 시작했다. 최고급 의상과 우아한 마차, 사열하는 군인들과 화려한 볼거리 등이 어우러져 시민들을 마치 ‘살아있는 신’을 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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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붉은 도포를 입은 카이사르가 갈리아 민족의 지도자 베르킨게토릭스의 항복을 받는 모습. 베르킨게토릭스는 개선행진 때 로마시민에게 포로로 공개된 후 처형되었다

(화려한 붉은 도포를 입은 카이사르가 갈리아 민족의 지도자 베르킨게토릭스의 항복을 받는 모습. 베르킨게토릭스는 개선행진 때 로마시민에게 포로로 공개된 후 처형되었다)

2.

카이사르의 개선행진은 Imperator 카이사르의 정점이었다. 영어 ‘emperor’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 ‘Imperator(임페라토르)’는 황제라는 의미 이전에 명예로운고급 군인,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 장군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임페라토르가 되어 개선행진을 한다는 것은 카이사르뿐 아니라 고대 로마의 위대한 장군들이라면 일생의 영예로운 자리였다. 이는 또한 로마 시민들에게도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는 축제였는데  ‘대머리 난봉꾼’이라는 부하 병사들의 놀림도 퍼레이드에 필수적인 유머 요소였다.

3.

카이사르에게 개선행진이 중요했던 이유는 개인의 영광뿐 아니라 대중의 지지를 최종적으로 확인받기 위한 측면이 있었다. 쿠테타를 일으켜 권력을 얻은 카이사르에게 시민들에게 공개적으로 인정받는 대중 행사가 마지막 관문이었다. 카이사르는 유서깊은 귀족 출신이었으나 그의 집안은 지배 권력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원로원의 배타성과 폐쇄성은 강력했고 특히 세력을 확장하는 카이사를 견제했다. 카이사르는 타고난 신분으로 불가능했던 영역을 군사력과 대중의 지지를 통해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철저히 충성하는 군대를 키웠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의 명성을 얻고자 노력했다.

4.

대중에게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고 이를 널리 알리는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카이사르는 대단히 훌륭한 캠페이너였다. 기본적으로 뛰어난 언어 감각을 가졌기 때문에 연설을 통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능수능란했다. 미남은 아니었지만 치장을 통한 이미지의 중요성도 잘 알았기 때문에 옷과 장식으로 자신을 꾸미는 데 있어 젊어서부터 돈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화려한 개선식과 로마 시민에 대한 보너스 지급, 화려한 연회 등을 아낌없이 베풀어 로마시민들의 인기를 얻었다. 카이사르는 동전에 자신의 얼굴을 새겨 넣어 널리 자신을 알린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이미지의 중요성, 대중 설득 커뮤니케이션, 파퓰리즘, 전쟁 영웅 서사, 감정적 선동 등 그가 보여준 완벽한 모습은 후대에 계속적으로 변형되면서 현대적 대중 정치 캠페인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카이사르는 ‘캠페인의 황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미지 캠페인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imperator의 행진은 이후 수많은 로마 황제들과 정치 지도자의 전승 세리모니로 이어졌다. 히틀러도 로마 시대의 개선행진을 모티브로 삼아 1934년 나치당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치른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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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얼굴이 새겨진 로마 동전. 로마에서 최초로 주화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홍보했다.)

김성은 (캠페인 컨설턴트)

[정치캠페인 15] 미국 뉴욕시장 선거 사례 연구 – 드 블라시오의 승리, 캠페인의 승리

빌 드 블라시오

빌 드 블라시오

“불평등과 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결코 쉬웠던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직면한 도전들은 수 십 년 간 계속 진행되어 왔으며, 우리가 다루기 시작할 문제들은 하룻밤에 해결될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뉴욕 시민은 진보의 길을 택했으며, 이제 우리는 하나의 도시로 함께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_ 당선 수락 연설 中에서

1. 11월 5일 빌 드 블라시오(Bill de Blasio)가 득표율 73%의 압도적인 승리로 109번째 뉴욕 시장이 되었다. 민주당 후보로는 24년 만에 당선된 그는 뉴욕시의 불평등 해소를 강조하며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선언했다.
당선 수락 연설에서 ‘근본적이고 진보적인 변화’를 요구한 그는 선거 캠페인 내내 부자 증세를 통한 유아시설 확충과 서민 주택난 완화, 유색인종에 대한 무차별적인 불심검문 금지 등 진보적인 정책을 제시해 왔다.

이제, 선거는 끝났다. 불과 네 달 전 어느 누구도 시장 당선을 확신하지 않았던 블라시오가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캠페인 관점에서 뉴욕시장 사례 연구 시리즈의 마지막을 정리해 본다.

2. 여론조사를 활용한 선거 전략

드 블라시오의 캠프에는 엠마 울프, 안나 그린버그, 레베카 커츠너 카츠 등 여성 참모들의 활약이 컸다. 그 중 안나 그린버그는 여론조사를 활용한 선거 전략을 세움으로써 드 블라시오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거의 15년 경험을 가진 여론조사 전문가로, 여론조사에 관한 전략적 조언으로 드 블라시오의 캠페인 팀을 지원했다.

안나 그린버그

안나 그린버그

엠마 울프

엠마 울프

드 블라시오는 지난 해 말까지 첫 여론조사를 실시하지 않았는데, 그린버그가 캠프에 결합하면서 여론조사를 통한 선거 전략의 기초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블룸버그 시장 집권 동안 아프리카계 미국인 거주자들이 특히 소외되었음을 간파하고, 캠페인 내내 뉴욕경찰의 불심검문에 반대하는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소외계층의 욕구를 정확하게 짚어냈다.

선거에서 여론조사가 특별한 것은 선거 전략과 전술의 잠재적 효과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이다. 유권자의 관심사를 정확히 분석함으로써 선거 캠페인 전반에 활용할 메시지, 슬로건 등을 정하고 유권자를 타게팅하여 효과를 극대화한다.
드 블라시오가 후발주자로 시작하였지만 꾸준하게 유권자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여론조사를 활용한 선거 전략 덕분이다. 그는 당선 수락 연설에서 이들 컨설턴트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3. 이미지 메이킹과 틈새 미디어 전략

빌 드 블라시오의 가족

빌 드 블라시오의 가족

이번 뉴욕 시장 선거의 슈퍼스타는 드 블라시오의 아들, 단테다. 모던 패밀리 캠페인으로 시작한 단테의 TV광고는 순식간에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단테의 헤어스타일은 핫 이슈가 되었다.

커츠너 카츠는 캠페인 초기에 결합한 컨설턴트 중 한 명이다. 그는 특히 흑인 아내를 전면에 내세우고 혼혈 자녀와 함께하는 다문화 가정의 모습을 부각시킴으로써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초점을 맞춘 미디어 전략을 구사했다.
지난 8월, 본격적으로 가족을 동원한 선거전에 돌입한 드 블라시오는 이 캠페인으로 뉴욕 중산층 가정의 책임 있는 가장 이미지를 구축했다. 이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그의 지지율은 급상승했다.

드 블라시오의 당선 직후 대부분의 언론은 흑인 부인과 자녀들을 전면에 내세운 ‘모던패밀리 캠페인’ 전략이 승리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모던 패밀리 캠페인은 뉴욕이 내재한 인종적, 문화적, 정치적 다양성을 가족을 통해 그대로 보여 주었다. 그리고 흑인을 포함한 소수 민족과 진보적 백인을 결합할 수 있다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였다. 뉴요커들의 감성을 두드린 캠페인이었다.

또한 드 블라시오의 캠프는 정확한 유권자 타게팅을 통한 미디어 전략을 구사하는 동시에 이메일,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 미디어를 훌륭하게 활용했다. 그의 디지털 디렉터인 제시카 싱글톤은 공유 가능한 인포그래픽, 후보자를 인간적으로 보여주는 인물 사진들, 그리고 돌풍을 일으킨 단테의 TV광고와 같은 동영상을 끊임없이 SNS를 통해 재생산했다.
다소 급진적인 정책에도 불구하고 드 블라시오가 다양한 계층으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다.
이제 선거전은 이미지와 콘텐츠로 커뮤니케이션 하는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4. 메시지, 메시지, 메시지

드 블라시오는 다문화 가정의 온화한 가장의 이미지를 구축한 이후 뉴욕 좌파와 중산층, 저소득 계층의 표심을 사로잡는 많은 정책들을 제시했다. 그는 선거 기간, 끊임없이 몇 가지 핵심을 반복했다. ‘불평등’, ‘두 도시 이야기’, ‘불심검문 금지’ 등은 고소득 계층을 대변해 온 블룸버그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알리는 동시에, 예비선거 당시 블룸버그의 지지를 받은 크리스틴 퀸뿐만 아니라 공화당 조셉 로타와의 차별성을 극대화했다.
7월 중순까지 민주당 예비후보 중 지지도 4위에 머물던 드 블라시오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상대 후보와의 극명한 차별성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 메시지이다.

특히 뉴욕의 불평등을 강조하는 “두 도시 이야기”는 선거 몇 달 동안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중산층 몰락이 뉴욕시의 전례 없는 관심거리가 되었고, 어떤 다른 대도시보다 가장 큰 소득격차를 보이는 뉴욕에서 사회적 불평등에 염증을 느낀 수많은 유권자들에게 그 메시지는, 강렬했다. 델 체카토는 이 메시지 아이디어를 제안한 블라시오 캠페인 수석 미디어 전략가로, 2012년에는 오바마 재선 캠페인의 TV 광고를 제작했다.

결국 전략은 성공했다. 그리고 드 블라시오는 당선 수락 연설에서 ‘두 도시 이야기’가 아닌 ‘하나의 도시’ 를 말한다. 핵심 이슈에 대한 분명하고 일관된 메시지의 반복은 선거 캠페인 동안 가장 효과적으로 후보자를 각인시킨다. 그것이 바로 메시지의 힘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캠페인의 힘인 것이다.

장유진 (캠페인 컨설턴트, 객원 필진)

출처: The conversation 링크, 폴리티코 링크

사진출처: 미러 링크

참고: CNN 링크, 링크, 뉴욕 타임즈 링크WNYC 링크, The Atlantic 링크, Ibtimes 링크

[정치캠페인 14] 미국 뉴욕시장 선거 사례 연구 – 민주당으로 회귀한 뉴욕, 그 후 블라시오가 직면한 도전

빌 드 블라시오의 뉴욕. 그 앞날은?

빌 드 블라시오의 뉴욕. 그 앞날은?

*주: 새롭게 선출된 드 블라시오 시장과 전임 블룸버그 시장의 차이에 대해 더 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에서 세 가지 방향으로 분석했다. 아래는 11월 8일자 기사를 전문 번역한 내용이다.

1. 지난 화요일 민주당 빌 드 블라시오는 약 46%의 차이로 공화당 조셉 로타를 물리치며 뉴욕 시장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는 압도적인 승리로 전임자 마이클 블룸버그의 정책 의제에 대한 권한을 완전히 이양받았다. 하지만 실제로 어떻게 블룸버그와는 다른 방향을 취하게 될까?

블룸버그와의 가장 명백한 차이는 불평등에 대한 접근 방식에 있다. 추정 자산 310억 달러로 포브스 세계 부호 랭킹 13위에 선정된 블룸버그는 점차 평범한 뉴욕 시민과는 동떨어진 인물로 규정되었다. 반면 블라시오는 “우리가 99%다”라는 슬로건을 만들었던 2011년의 월가시위(Occupy Wall Street)에 의해 환기된 여러 주제들을 채택했다.

캠페인 내내 블라시오는 뉴욕의 표면적인 번영이 블룸버그로 대표되는 상위 1%의 부유층과 가난에 허덕이는 빈곤층인 두 계층의 도시를 위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블라시오는 그의 전임자가 빈곤층과 중산층은 무시한 채, 뉴욕의 가장 부유한 자치구인 맨하탄에 지나치게 집중하며 주로 상위계층에 득이 되는 프로그램을 장려했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2. 소득 격차를 활용하기

사실 이번 시장 선거는 불평등과 뉴욕 중산층의 쇠퇴에 전례 없는 이목이 집중되었다. 통계조사 분석에 따르면 뉴욕시의 평균 가계 소득은 2007년 48,631달러에서 인플레를 감안한 달러로 계산했을 때 45,806달러로 하락했고, 다른 어떤 대도시보다도 큰 소득 격차를 보인다.

주민의 약 70%를 구성하는, 임차가구들이 수입은 부진한 반면 주거용 부동산 시장에 인플레이션 압박이 가해지며 괴로워하고 있다. 임차가구의 약 30%는 소득의 절반 또는 그 이상을 임대료로 지불하고 있는데, 2007년 이래 거의 5% 증가했다. 추가로 23%는 1/3 이상을 지불하는데, 이는 6년 새 2% 이상 증가한 수치다.

이러한 문제들이 캠페인 기간 동안 광범위하게 논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블룸버그는 자신의 금권정치적 이미지를 떨쳐내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다. 자주 인용된 뉴욕매거진 인터뷰에서 그는 “만약 우리가 전세계의 억만장자들 중 이곳으로 이주하려는 무리를 찾아 낸다면, 그것은 신의 선물이 될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을 돌보는데 쓰일 세입이 그들에게서 나올 것이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블라시오는 부(wealth)라는 것이 단순히 억만장자의 자산으로부터 흘러나와 확산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하면서, 대신 뉴욕시의 증가하는 불평등에 계속 초점을 맞췄다. 그가 예견한 것처럼, 뉴욕시는 연간 50만 달러 이상의 소득에 대한 증세뿐만 아니라, 적정가격의 주택과 보편적인 유치원을 위한 강력한 프로그램들이 절실히 필요하다.

3. 치안보다 우선되는 경제

블라시오는 또한 경찰 전술 문제에 있어 블룸버그 시대와는 뚜렷한 대조를 이끌어냈다. 블룸버그와 그의 전임자 루돌프 줄리아니는 범죄에 대한 강경한 접근으로 공공 안정을 극적으로 향상시키는데 분명한 성공을 거둬 얼마의 지지를 얻었다. 블라시오는 경찰이 무차별적으로 ‘불심검문’을 사용하는 것을 비난했다. 이 전술은 경찰이 의심스럽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구금하거나 영장 없이 수색을 실시함을 수반한다. 이는 유색인종의 젊은이들이 일상생활 도중에 정기적으로 검문을 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불심검문’은 저소득층에서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오랜 법적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로타는 불심검문에 대한 블라시오의 비난을 주요 캠페인 이슈로 만들려고 노력하면서, 블라시오가 당선된다면 뉴욕은 높은 살인률과 노상강도로 흉악했던 옛 시절로 회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메세지는 영향을 미치는 데 실패했다. 뉴욕 시민들은 출구 조사에서 주요 관심사로 경제를 언급하며, 지금 시점에선 범죄와 관련해 충분히 낙천적임을 보였다.

선거 캠페인에서 개인 자산을 자유롭게 지출한 블룸버그는 두 번의 재선으로 12년 동안 시장직을 유지해왔다. 그에 대한 논쟁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그는 시장직을 2번의 연임으로 제한한 국민투표를 무시하며 세 번째 임기를 모색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뉴욕이 국제 금융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재정과 경영 전문 기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2009년 재선에 성공했을 때에도 블룸버그의 재선을 둘러싼 악감정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민주당 예비선거에까지 영향을 미쳐, 블라시오가 기득권층의 후보자였던 크리스틴 퀸을 물리치게 되었다.

4. 성장 친화적 시장

그러나 예전 무명시절과 예비선거에서의 놀라운 승리에도 불구하고, 블라시오는 뉴욕의 과거와 완전히 단절됨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의 시장직이 전임자와 아주 다르지는 않을 것을 보여주는 한 가지는 부동산 개발에 대한 지원에 있다. 선거 다음날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차기 시장 빌 드 블라시오는 수십 년 만에 뉴욕에서 가장 성장 친화적인 시장이 될 것”이라고 독자들을 안심시키면서 “그는 부동산 산업(에서 많은 돈을 마련했으며)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또한 블라시오는 택시 업계와 전기 차량으로 센트럴 파크의 마차를 대체하려고 하는 그룹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았다. 이러한 원조에 대한 보답 또는 그들의 입장에 대한 동의로써, 그는 자치구 외부 영업용 택시들에게 경쟁을 허락하는 것을 반대해왔고, 고용 손실이 수반됨에도 불구하고 공원 내 마차를 제거하게 될 것이라고 암시해왔다. 그런가 하면 그는 빈민가의 고급 주택지화를 강하게 반대하면서, 적정가격의 주택을 포함하는 완전히 새로운 거주 프로젝트를 위한 건축 규제를 요구하고 있다.

블라시오가 블룸버그 그리고 패배한 로타 두 사람과 명백히 다른 지점은 블라시오의 반대자들이 심각한 약점으로 들먹이던 ‘관리 경험의 부족’이다. 그의 이전 직위(시의회의원과 공익옹호관)는 소수의 직원과 예산을 지휘하는 것이었다. 이제 그는 30만에 가까운 노동 인력을 이끌고 700억 달러의 예산을 감독하게 될 것이다.

블룸버그를 제외한 거의 모든 뉴욕의 전임 시장들 역시 주요 관리직의 책임을 가져보지 않은 채 시정에 투입되었다. 대부분이 입법 기관에서 재직하였는데, 줄리아니가 연방 검사를 역임했는가 하면 에이브 빔은 시 회계 감사로 복무했다. 사실상 무명으로써 승산이 거의 없던 블라시오를 우승후보에 이르게 한, 거의 흠잡을 데 없는 그의 캠페인은 (2006년 힐러리 클린턴 미 상원의원 캠페인에서의 성공적인 매니지먼트는 차치하더라도) 블라시오 행정부에게 아주 좋은 전조이다.

뉴욕시에 대한 블라시오의 계획은 원대하지만, 그의 실질적인 승리가 결코 미래의 진보적 승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뉴욕 시장 선거의 기묘함 중 하나는 외견상 모순되어 보인다는 것이다. 1985년에 민주당 에드워드 코흐는 68포인트로 이겼다. 하지만 4년 후 훨씬 좁은 격차로 민주당 데이비드 디킨스가 승리한 이후에는, 준엄한 공화당의 줄리아니가 1993년 이후의 뉴욕을 이끌었고, 2001년 이후는 블룸버그가 그 뒤를 이었다. 블라시오의 큰 격차의 승리가 건강하고 진보적인 권력 이양으로 보일 수는 있겠지만, 뉴욕은 전에도 급격한 방향 전환을 했었고, 틀림없이 다시 그렇게 될 것이다.

장유진(캠페인 컨설턴트, 객원 필진)

출처: The conversation 링크

[정치캠페인 13] 미국 뉴욕시장 선거 사례 연구 – 드 블라시오, 12년간 뉴욕을 이끈 시장 블룸버그와 만나다

그동안 Acase는 미국 뉴욕시장 선거 사례를 연구해 공유해왔습니다. 민주당 빌 드 블라시오(Bill de Blasio)의 당선이 확정되며 뉴욕시장 선거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오늘 세 개의 포스팅을 끝으로 이번 시리즈를 마무리합니다. 또 다른 유익한 정치캠페인 연구로 찾아뵙겠습니다.

드 블라시오와 블룸버그의 만남

드 블라시오와 블룸버그의 만남

*주: 당선 다음 날, 뉴욕 시장으로 당선된 빌 드 블라시오(Bill de Blasio)의 첫 일정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마이클 블룸버그(Michael R. Bloomberg) 시장을 만난 것이다. 둘은 풍기는 이미지 차이만큼이나 표방하는 정책 방향도 큰 차이를 보였고 서로를 노골적으로 비판해 왔다. 하지만 블라시오의 공식 첫 일정이 블룸버그와의 조찬 모임이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12년간 뉴욕을 이끌며, 성과를 내온 전임 시장과의 만남. 그 자리에서 그는 전임 시장의 노고를 인정했으며 대신 많은 팁을 얻었다. 현재와 미래의 아름다운 터치다. 드 블라시오의 당찬 포부는 성공할 수 있을까? 그들의 만남을 그린 뉴욕 타임즈의 기사를 소개한다.

1. 뉴욕시장 당선자로서 첫번째 아침을 맞이한 빌 드 블라시오는 쓰레기 처리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며 마이클 블룸버그와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다. 그가 곧 자리를 뺏어오게 될 사람과 이런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 다소 이상하게 비춰질 수도 있다.

2. 드 블라시오는 시인인 동시에 스피치라이터인 그의 부인 셜레인 맥크레이(Chirlane McCray)가 그의 새 행정부의 주요 멤버를 뽑는 일에 중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 말인즉, 부부가 함께 후보자들을 심사할 계획이란 것이다.
민주당 후보 드 블라시오는 이번 시장 선거에서 73%의 지지율로 당선됐다. 이 날 그는 앞으로 그가 계승하게 될 행정부의 모습이 현재와 완전히 다를 것인지에 대해 약간의 의혹을 남겼다. 그리고 그의 진보적 사회 계획을 ‘신성한 임무’라고 묘사하며 압도적인 지지율차로 거둔 승리가 그의 계획에 힘을 실어줄 것이라 이야기했다.
그는 인수인계 계획을 밝히면서, 앞으로 그가 꾸리게 될 팀은 뉴욕 시의 눈부신 다양성을 반영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또한 그는 신속히 새 교육감과 경찰청장을 임명할 것이라고 굳게 약속했다.

3. 하지만 블룸버그와의 아침 회의에서 엄청난 변화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기업 경영식 통치방식과 자유시장주의를 가진 블룸버그는 선거유세 중 드 블라시오를 가차없이 공격한 바 있다. 이는 정치적인 긴장감과, 극명하게 다른 개인적 스타일의 충돌을 담고 있는 장면이었다.
칙칙하고 약간 헤진 정장을 입은 드 블라시오는 깍지를 낀 채, 접은 소매 차림의 블룸버그가 위생시설과 채용 의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회의는 시청의 열린 작업 공간 불펜(Bullpen)에서 열렸는데, 이곳은 블룸버그 개혁의 일환으로 드 블라시오가 강하게 비판했던 바 있다. 블룸버그가 드 블라시오와 인사를 나눌 때, 그의 옆자리에 있던 블룸버그의 비서실장은 드 블라시오에게 시 운영에 관한 ‘완전한’ 가이드라인을 건넸다. 드 블라시오는 좀 더 절제된 접근방식을 취했다. 그는 이 회의에 주요 수행원 아무도 데려오지 않았다. 사람들 말에 따르면, 회의는 화기애애했다고 한다. 늘 그래왔듯이 드 블라시오가 블룸버그식 치안, 교육 그리고 경제발전에 대한 접근에 상당한 변화를 원한다고 말했음에도, 블룸버그는 이에 대해 단 한 번 가볍게 ‘멍청하다’고 응수했을 뿐이었다. 더 큰 긴장완화의 신호가 보이기도 했다. 시청을 나설 때 드 블라시오는 블룸버그의 최고 정책 자문관인 하워드 울프슨(Howard Wolfson)을 껴안았다. 하워드 울프슨은 민주당 경선에서 드 블라시오 후보를 공격한 적이 있다.(두 사람은 2000년 힐러리 클린턴의 상원 캠페인에서 함께 일한 적이 있다.) 드 블라시오는 블룸버그와의 만남이 매우 유익한 대화였고, 굉장히 화기애애했다고 밝혔다.

4. 블룸버그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드 블라시오가 내년 1월 1일 시정을 시작하기 전까지, 그와 정기적으로 만날 것을 합의했다고 밝혔다.
“드 블라시오가 나보다 뛰어난 시장이 되는 것은 내게도 이득이다. 우리는 우리 전임자가 그랬듯이, 그들에게 많은 일거리를 주었다. 하지만 앞으로 뉴욕시의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갈 한 사람으로서 그의 행정부가 성공하길 바란다.” 블룸버그는 인터뷰에서 말했다.
여전히 블룸버그는 반대의 여지도 남겼다. 그는 드 블라시오가 대도시를 통치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만의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쉬워 보이는 일도 막상 뛰어들어보면 어렵다는 것을 알 것이고, 그러면 아마 그도 마음을 바꿀 것이다.” 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드 블라시오는 그 어떤 것도 재고할 여지가 없는 듯이 보였다.
시장 당선자로서 첫 번째 기자 회견을 주재하면서 그는 평온하고 침착해 보였다. 후보자 시절 보여줬던 맹렬한 연설 대신, 기자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그의 도시 계획에 대해 말했다.
“우리 모두는 이 도시의 시민들을 위해 봉사하고, 후보시절 내걸었던 공약을 완수하는 것이 신성한 임무라는 것을 알고 있다.”

5. 드 블라시오는 유력인사이자 오랫동안 사회활동가로 일해 온 칼 웨이스브로드(Carl Weisbrod)를 행정부의 수장으로 임명할 것을 밝혔다.
69세의 웨이스브로드는 지방자치에 숙련된 베테랑으로, 많은 도시의 정치계를 경험했고 1970년대에 타임스퀘어를 정리하는 운동을 이끌었으며 시의 경제 단체들의 설립을 도왔던 경력이 있다.
그는 드 블라시오가 재능 있고 전도유망한 인재를 그의 행정부로 끌어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블룸버그측 사람들의 우려를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그와 공동 의장을 맡을 제니퍼 존스 오스틴(Jennifer Jones Austin)는 블룸버그 행정부의 전 차장이었으며, 주 업무는 아동•가족 복지에 관한 것이었다. 오스틴은 드 블라시오가 시의회의 공공복지 의원회 의장으로 있을 때 함께 일했던 적이 있다.
드 블라시오는 오바마 행정부와 민주당의 전 보좌관이었던 로라 산투치(Laura Santucci)를 위원회 이사로 임명했고 최근까지 여론팀에서 그의 보좌관으로 일했던 우르술리나 라미네즈(Ursulina Ramirez)를 로라 산투치의 보좌관으로 임명했다.

6. 드 블라시오는 “길고 길었던 싸움 끝, 셜레인과 나는 며칠 동안 조용히 생각하고 재정비할 시간을 가질 것이다. 그런 시간이 정말 필요하다.”라고 부부의 푸에르토리코 휴가에 대해 밝혔다. 동시에 그는 돌아서서 새롭게 임명된 그의 팀을 힐끗 보았다. “내 동료들 중 이런 화려한 휴가를 가질 여유가 있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일이나 열심히 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정혜진

출처: 뉴욕 타임즈 링크

[정치캠페인 12] 미국 뉴욕시장 선거 사례 연구 – 모든 후보는 5가지의 좋은 사진이 필요하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블라시오의 1980년대 사진들”

*주: 메일온라인(Mailonline)은 뉴욕시장 선거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몇 장의 사진을 소개했다. 젊은 시절 드 블라시오의 흑백사진이다. 아프로 헤어스타일을 한 아들 단테의 사진, 가족들과 찍은 사진 등은 후보자에 대한 친밀도를 높인다. 데일리뉴스 역시 비슷한 헤어스타일의 오바마 대통령과 단테의 사진을 소개했다. 언론에서 사진을 활용할 수 있도록 ‘좋은 사진’을 선별한 블라시오의 전략은 치밀하다. 선거 캠페인 과정에서 사진이 갖는 중요성을 살펴보자.

1. 인물사진-그 아버지에 그 아들

<1980년대 학생 시절의 드 블라시오> <아프로 머리를 한 아들 단테>

흑백사진 속 드 블라시오의 모습은 아프로 헤어스타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그의 아들 단테의 모습과 비슷하다. 유권자들은 자유분방한 젊은 블라시오의 사진을 보며 흥미로워 하며, 과거 블라시오가 어떤 궤적을 걸었는지 궁금해 한다.
관심이 곧바로 투표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헤어스타일로 관심을 갖게 된 유권자들은 후보자의 몇 가지 단서로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그 이미지는 선거의 당락을 결정한다. 그래서 선거에서는 인물사진이 중요하다.

2. 사진으로 말하기-스토리텔링이 있는 사진

<1981년 4월, 대학 등록금 인상에 항의하는 블라시오>

<1980년 9월, NYU 학생회관에서 찍은 학생활동가의 모습>

후보자가 활용하는 사진은 선거 전략과 맞닿아 있다. 지난 민주당 예비선거 결과 드 블라시오의 주지지층은 흑인 유권자와 좌파 뉴요커였다. (*주: 지난 글 참조 http://acase.co.kr/2013/09/24/campaign6/) 선거 캠페인 과정에서 줄곧 진보적 이념을 보여주었던 드 블라시오의 과거 학생운동 시절 사진은 그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후보자의 과거 이력과 현재 정책적 주장의 일관성을 보여줌으로써 신뢰의 이미지를 쌓아간다. 후보자의 이미지 창출은 목표하는 지지세력에 부합해야 한다.
또한 30여 년 전 뉴욕 대학교에서 등록금 인상에 반대하며 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흑백사진은 드 블라시오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이야기거리를 만드는 사진이 캠페인 과정에서는 필요하다.

3. 사진으로 말하기, 오바마의 사진과 지지

<아프로 스타일을 즐긴 오바마 대통령> <드 블라시오의 아들 단테>

유명인사의 지지선언 역시 선거 캠페인 과정에서 유권자들을 흥미롭게 한다. 유권자들은 후보의 인간관계가 어떤지 보고 싶어 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유명인의 선거참여가 후보자의 지지도에 영향을 미치는지 여부는 각 후보자별로 다르다.(*주: 안차수, 경남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유명인의 정치참여와 대학생의 정치태도 및 투표행위에 관한 연구』 참고) 하지만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지도자가 지지발언을 했다면, 파급효과는 좀 더 클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9월 23일 언론을 통해 공식적으로 드 블라시오를 지지했고, 이어 다음 날 민주당 기금모금 행사에 참석하여 단테의 아프로 헤어스타일에 대해 언급했다.
“고백하건데, 내 아프로 헤어스타일은 결코 좋은 적이 없었다” 모금행사에서 대통령의 헤어스타일 언급은 화제가 됐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오바마의 지지가 정치적으로 보이기보다는, 친근한 누군가가 ‘블라시오는 훌륭한 후보자’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데일리뉴스의 오바마 사진은 캠프에서 말하고 싶은 중요한 것을 대신 얘기해 준다. 그런 점에서 헤어스타일이란 작은 모티브로 유권자들을 사로잡은 드 블라시오의 캠페인 전략은 뛰어나다.

4. 가족사진-친근한 아버지로 보이기

<2010년 가족 곁에서 취임 선거를 하는 블라시오>

<지난 9월 예비선거 직후 가족들과 함께한 드 블라시오>

선거과정에서 후보자의 이미지 구축 전략은 다양하나, 그 중 상대 후보자와 차별화되는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이 주효하다. 상대 후보자와의 차별성이 뚜렷하게 부각되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민주당 후보자인 드 블라시오는 뉴욕시 공익옹호관을, 공화당 조셉 로타는 전 메트로폴리탄 교통공사 회장을 지냈다. 로타는 월스트리트 금융 투자가 출신으로 뉴욕시 행정에 밝지만, 정치인으로서 특징적인 이미지가 없다. 더욱이 백만장자 블룸버그 시장의 오랜 임기에 지친 뉴욕시민에게 로타는 큰 매력을 어필하지 못했다.
반면 블라시오는 흑인 아내와 함께 다문화 가정의 건실한 가장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줄곧 주장해 온 서민정책과 중산층 위주의 정책에 부합하는 전략이다. 이러한 이미지 부각으로 드 블라시오는 실제 지난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흑인과 소수민족, 중산층에게 높은 지지를 얻었다.

5. 정치 컨설턴트 포첵스의 선거 비법서, 『Running for Office』 에는 후보자들의 사진 활용법을 5가지로 제시한다. 모든 후보는 5가지의 좋은 사진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각각의 항목을 보면 드 블라시오가 이번 선거에서 얼마나 사진을 잘 활용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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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블라시오는 ①젊은 시절 아프로 헤어스타일을 연상시키는 사진으로 인물사진을 활용했고, ②자신의 지지기반을 결집시킬 수 있는 진보적 모습이 두드러진 대학시절 활동가 사진으로 자신의 이념적 성향을 강조했다. 사진으로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③ 가족사진으로, 친근한 아버지의 이미지를 구축함으로써 뉴욕시 유권자에게 ‘믿을 수 있는 후보자’로 쐬기를 밖았다.
그는 불과 몇 달 전만해도 민주당 내에서도 주목받지 못하는 후보자 중 하나였다. 하지만 드 블라시오 캠프는 사진으로 활용할 수 있는 위 5가지 전략 중 3가지를 통해 지지세력을 구축해 갔다. 사진은 선거 캠페인 과정에서 전략적으로 후보자의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이다.

장유진 (캠페인 컨설턴트, 객원 필진)

사진 출처: 데일리메일 링크, 링크

참고: 뉴욕 타임즈 링크, 뉴욕 데일리뉴스 링크

[정치캠페인 11] 미국 뉴욕시장 선거 사례 연구 – 추격하는 도전자에게 무승부란 앞서가는 후보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드 블라시오와 로타의 두번째 TV토론 동영상 링크 http://nyti.ms/19twUxm

*주: 뉴욕시장 선출을 위한 두 번째 TV토론회는 지난 토론과는 달리 막상막하다. 언론은 양 후보자 모두 토론에 잘 대처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데일리 뉴스에서 세 전문가의 토론회 분석 기사를 내보냈다. 아래는 기사를 발췌 번역한 것이다.

<미쉘린 블럼 소장> <잔느 자이노 교수> <존 크루즈 코치>

0. 세 차례의 토론회 중 두 번째 토론에서 양 후보자의 토론 수행능력을 세 전문가가 평가했다. 조 로타가 이번엔 강한 토론을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강력하지 않았다는 데 모두 의견이 일치했다. 세 명의 전문가가 매긴 후보자별 점수이다. 결론은 동점이다.

결론은 동점

결론은 동점

1. 바루크 대학 설문 연구소 미쉘린 블럼 소장

내용: 뜻밖의 합의로 폭 넓은 주제를 다뤘다. 이견이나 공격은 미래나 각자의 비전 보다는 과거에 대한 것으로, 좀 더 감정적이며 많은 유권자들이 기억하거나 신경도 쓰지 않을 줄리아니 시대(*로타가 부시장으로 일한) 대 딘킨스 시대(*블라시오가 부보좌관으로 일한)에 대한 논쟁이었다.

형식: 로타는 지난 토론회 때 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당신 어느 별에서 왔냐?(what color is the sky on your planet?)”며 유감을 익살스럽게 표현 했지만, 드 블라시오에 대해 계속 “미친 모자장수(mad hatter)” 라고 한 것은 두 번 다 묵살되고 자신의 티파티 이미지만 강화했다. 드 블라시오는 길게 응수하며 공격적으로 치고 나왔다. 나중에는 둘 다 누그러졌지만. 시간 제한 라운드에서는 어떤 접전도 없었다. 로타는 “안전이 아니면 후회”, 블라시오는 “안전하고 공정한 도시”로 마무리 했다.

결과: 반전은 없었다. 따라서 44 포인트 앞선 블라시오 후보가 다시 승리한다. 로타는 블라시오의 엄청난 실수라든지 이번 경선을 날려버릴 폭탄이 필요했지만,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드 블라시오는 여전히 우승후보로서 달려가고 있다.

2. 로나 대학 및 뉴욕대 정치학과 잔느 자이노 교수

내용: 실질적이고 활기찬 토론. 후보자들은 불심검문과 세금, 교육 문제에서부터 적정 가격의 주택, 차터 스쿨, 감시 등 여러 이슈를 아우르며 격렬한 언쟁을 했다. 그들은 시청자에게 서로 동의하는 몇몇 부분(예를 들어, 센트럴파크 마차 운영 폐지)뿐만 아니라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분명히 구별시켜 주었다.

형식: 로타는 첫 토론 때 보다 훨씬 더 강했다. 그는 동요하는 모습을 벗어나 여러 차례 상대에게 타격을 가하고, 전 상사를 옹호하며, 자신감을 드러냈고, 편안해 보였으며, 심지어 유머감각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문제는 그것이 투표에서 차이를 만들기엔 너무 늦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드 블라시오는 지난 주 못지않게 이번에도 공격적이었다. 그는 왕성한 에너지를 과시했고, 결코 상대에게 주도권을 내주지 않으면서 확실히 40 포인트 이상 우세한 사람처럼 안전하게 가지 않았다.

결과: 좀 더 맹렬한 로타와 한결 같이 돌진하는 드 블라시오를 봤다. 이제 문제는 충분한 수의 부동층 유권자들이 이 토론회를 보고 투표에 어떤 식으로 의미 있는 영향을 줄 수 있을지의 여부인데, 이 선거에서 그럴 가망은 거의 없어 보인다. 하지만 로타의 토론 수행능력은 투표 격차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 만큼 강했다.

3. 브롱스 과학고등학교 연설 및 토론팀 존 크루즈 코치

내용: 오늘 밤 토론에서 많은 분야가 다뤄졌지만, 양 후보자는 불편한 세부사항들에 대해 빙빙 돌리곤 했다. 로타는 블라시오의 영유아 정책(Pre-K Plan)에 다른 대안이 없음을 지적하면서도, 블라시오가 시장이 된다면 안전면에서 정확히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분명히 말하지 못했다. 로타는 여론조사에서 40 포인트 이상 뒤떨어져 있다. 그는 블라시오가 했던 것 보다 더 상세한 내용들을 제공해야 한다.

형식: 로타는 루디 줄리아니에 관한 상대의 지적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한층 강력한 토론을 했다. 분할 스크린은 드 블라시오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는데, 블라시오는 로타의 말을 들을 때 자신의 얼굴 표정을 체크할 필요가 있다. 그의 표정은 종종 경멸적이거나 자주 불쾌감을 드러냈다.

결과: ‘두 도시 이야기’는 진부하게 들리기 시작했지만, 블라시오가 안전한 길을 택하고 효과를 본 것에만 매달린다고 비난하기는 어렵다. ‘두 도시 이야기’는 지금까지 두 토론회의 테마가 되어 왔다. 로타의 “안전을 택하거나 후회를 택하거나(safe choice or sorry choice)”라는 기치는 캠페인에서 흥미로운 테마일 수 있었겠지만, 자신만의 색깔을 찾기엔 다소 늦은 감이 있다.

장유진 (캠페인 컨설턴트, 객원 필진)

출처: 뉴욕 데일리 뉴스 링크

동영상 출처: 뉴욕 타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