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도착한 책]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다이제스트 고전의 불쾌한 시공간

1. 고전 읽기는 힘들다. 과거의 위대한 생각을 쫓아가는 읽기는 여러 방해물을 만나게 된다. 우선 언어의 문제가 있다. 사실상 고전을 1차 텍스트로 읽는 것은 전공자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설령 1차 텍스트의 독해가 가능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고전의 시대적인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고전의 정수를 발견하기 힘들다. 아울러 고전이 또 다른 ‘당대의 고전’과 인물들을 인용하기 시작하면 고전 읽기는 불가능한 암호 해독이 되어버린다.

2.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은 연암 박지원의 삶과 사상을 논하고 열하일기의 일부를 소개하는 책이다. 이 책은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의 첫번째 책으로 출간된 책이다. 1에서 제기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기획된 책인 것 같다. 방대한 양의 고전을 발췌, 요약하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주는 책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다.

3. 정밀한 주석이 반영된 고전 번역 작업에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번역자의 성실한 작업을 통하더라도 일반 독자 입장에서는 여전히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다. 이 책은 박희병 교수, 정민 교수 등의 번역본, 즉 2차 텍스트에 기반해 구성된 3차 텍스트에 해당한다.  2차 텍스트가 여전히 부담스럽다면 3차 텍스트는 여전히 유의미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2차 텍스트의 성실한 요약, 발췌본으로서의 3차 텍스트는 아닌 것 같다.

4. 고미숙은 연암 박지원을 설명하기 위해 ‘리좀’과 ‘탈주’, ‘재코드’라는 개념을 등장시킨다. 고미숙의 연암에는 들뢰즈와 가타리, 푸코가 등장한다. 이 책은 연암의 책이라기 보다는 고미숙의 책이다.이 책은 연암의 3차 텍스라기 보다는 고미숙의 1차 텍스트다.

5. 고미숙을 통해 연암 박지원을 접한 독자들은 연암을 어떻게 생각할까? 만약 박지원을 ‘유머 넘치는 이야기꾼’ 정도로만으로 기억하게 된다면 읽지 않는 것보다도 못한 결과다. 고미숙의 연암 읽기엔 많은 것이 빠져 있거나 왜곡되어 있다. 조선시대 최고 지식인이자 최고 명문가의 일원로서의 현실 인식, 시대와의 불화, 사유 방법론, 독서론, 창작론은 실종된다. 그 빈 자리는 리좀과 탈주와 들뢰즈/가타리로 채워지거나 얼버무려진다. 이 현저한 차이는 치명적이다. 시대에 대한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았던, 독자적 사유체계를 완성한 최고의 지식인 박지원은 사라지고 재기 넘치는 작가 박지원만 남게되어 버린다.

6.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는 다이제스트식 고전 읽기의 위험함을 체험하게해 준 ‘고마운’ 책이다. 고마운 책은 이 한 권으로 충분할 것 같다. 박희병 교수와 김혈조 교수의 연암 2차 텍스트에 해당하는 저작들을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박희병 교수의 ‘연암을 읽는다’는 2차 텍스트와 3차 텍스트의 중간에 위치하는 책으로 봐야할 것 같다.)

* 연암을 읽는다, 박희병 저, 돌베개
* 나의 아버지 박지원, 박종채 저, 박희병 역, 돌베개
* 열하일기, 박지원 저, 김혈조 역, 돌베개

pjw

김봉수